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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너머의 여름, 프롤로그, 벽에 던지던 아이

벽 너머의 여름

프롤로그

벽에 던지던 아이

텔레비전 속 여름은 이상할 만큼 밝았다.

흰 유니폼들이 흙먼지 속에서 뛰고 있었다.
햇빛은 너무 강해서 화면 가장자리가 하얗게 번졌고, 관중석은 색색의 수건과 응원 깃발로 물결쳤다.

와아아아아아아——!

낡은 텔레비전 스피커가 찢어질 듯 울렸다.

강하준은 밥상 앞에 앉은 채 숟가락을 쥐고 있었다.

젓가락은 아직 손에 닿지도 않았다.
밥은 김이 올라오고 있었고, 된장국 위에는 두부 한 조각이 둥둥 떠 있었다.
하지만 하준의 눈은 텔레비전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운드 위에 선 투수가 있었다.

얼굴은 새까맣게 탔다.
모자챙 아래로 땀이 흘렀다.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다.

그런데도 투수는 웃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웃는 것 같았다.
입꼬리가 올라가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하준은 그렇게 느꼈다.

저 사람은 지금 울어도 이상하지 않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하준아.”

엄마가 불렀다.

“밥 식는다.”

하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투수가 모자를 벗어 이마를 훔쳤다.
포수가 미트를 두드렸다.
타자는 배트를 한 번 크게 돌리고 타석에 들어섰다.

해설자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하준은 일본어를 전부 알아듣지는 못했다.
아니, 사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학교에서도, 거리에서도, 슈퍼에서도, 늘 듣던 말이었다.

그런데 텔레비전 속 사람들의 말은 너무 빨랐다.
너무 뜨거웠고, 너무 멀었다.

그래서 단어 몇 개만 귀에 박혔다.

“마지막.”
“에이스.”
“한국에서 온.”
“유학생.”
“고시엔.”

고시엔.

하준은 그 말이 무엇인지 몰랐다.

사람 이름인지, 학교 이름인지, 어느 도시 이름인지도 몰랐다.
다만 화면 속 모든 사람이 그 단어를 특별하게 말하고 있다는 건 알았다.

투수가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왼발이 올라갔다.
몸이 접혔다.
하얀 공이 손끝에서 사라졌다.

쾅!

포수의 미트가 울렸다.

타자의 배트는 허공을 갈랐다.

잠깐, 시간이 멈췄다.

그리고 다음 순간.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세상이 터졌다.

포수가 마스크를 벗어 던지고 마운드로 달려갔다.
1루수가, 유격수가, 외야수들이 모두 한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

투수는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누군가 그를 끌어안았다.

또 누군가가 달려와 등을 쳤다.
또 누군가가 모자를 벗겨 머리를 헝클었다.

하얀 유니폼들이 한데 엉켰다.

그리고 곧, 투수의 몸이 하늘로 떠올랐다.

한 번.

두 번.

세 번.

선수들이 그를 위로 던졌다가 다시 받았다.
다시 던졌다가 다시 받았다.

하준은 그것을 본 적이 없었다.

운동회 때 이긴 반 아이들이 선생님을 둘러싸는 건 본 적이 있었다.
친구들끼리 어깨동무를 하고 소리치는 것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저건 달랐다.

저 사람은 혼자 공을 던졌는데,
마지막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게 이상했다.

공 하나를 던졌을 뿐인데.
사람들이 저렇게 달려와 안아줄 수 있다는 게.

하준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엄마.”

“응?”

“저 사람, 안 떨어져?”

엄마는 설거지를 하다 말고 텔레비전을 흘끗 보았다.

“괜찮아. 다 같이 받잖아.”

“다 같이…….”

하준은 화면을 바라보았다.

투수는 몇 번이고 공중으로 떠올랐다.
떨어질 때마다, 누군가의 손이 그를 받았다.

하준은 작게 말했다.

“저 사람은 좋겠다.”

“왜?”

하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좋겠다는 말밖에 몰랐다.
떨어져도 받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왜 좋은 건지, 설명할 수 없었다.

싱크대 물소리가 났다.
외할머니가 안방에서 기침을 했다.
바깥에서는 오토바이가 골목을 지나갔다.

텔레비전 속 투수는 아직도 동료들의 손 위에 있었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몸을 굳히고 있던 그가, 어느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울었다.

그런데도 모두가 웃고 있었다.

하준은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해졌다.

밥을 먹지도 않았는데 목이 막혔다.

화면 아래로 투수의 이름이 지나갔다.

박도윤.

그 옆에는 일본식 이름도 함께 적혀 있었다.

사카이 도마.

두 개의 이름이 한 화면에 있었다.

하준은 그 이름들을 오래 보았다.

강하준.
미즈하라 하루토.

자기 이름도 두 개였다.

그게 늘 싫었다.

학교에서는 미즈하라 하루토.
집에서는 강하준.

선생님은 출석부를 부를 때 한 번씩 멈칫했다.
친구들은 가끔 물었다.

“너는 어느 쪽이 진짜 이름이야?”

하준은 그때마다 대답하지 못했다.

진짜가 둘일 수도 있는지 몰랐다.
아니면 둘 다 진짜가 아닐 수도 있는지 몰랐다.

그런데 텔레비전 속 사람은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도 마운드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모두에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하준은 그 장면을 잊지 못했다.

그날 밤, 하준은 잠을 자지 못했다.

천장을 보고 누워 있었다.
밖에서는 여름 벌레 소리가 났다.
선풍기는 목이 아픈 사람처럼 끼익끼익 소리를 내며 돌았다.

안방에서는 엄마와 외할머니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돈 이야기였다.

하준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숨을 죽였다.
자신이 듣고 있다는 걸 들키면 안 될 것 같았다.

“글러브도 사야 한다며.”

“그런 건 비싸지.”

“애가 하고 싶어하는 거 같던데.”

“하고 싶은 거 다 시켜줄 수 있으면 좋지.”

엄마의 목소리는 작았다.

“근데 지금은…….”

그 뒤는 들리지 않았다.

하준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하고 싶다고 말하지 말걸.

그렇게 생각했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곤란해지지 않는다.
말하지 않으면 엄마가 미안한 얼굴을 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으면 외할머니가 한숨을 쉬지 않는다.

하준은 어릴 때부터 그걸 조금씩 배웠다.

원하는 걸 말하면, 누군가는 미안해진다.

그래서 원하는 건 혼자 생각하는 게 낫다.

다음 날, 하준은 학교 운동장 옆에 붙은 리틀야구 모집 전단을 한참 보고 있었다.

파란 글씨가 큼지막했다.

신입 부원 모집!
함께 야구하자!

함께.

하준은 그 단어를 오래 보았다.

“너도 하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같은 반 아이들이었다.
셋이 나란히 서서 전단을 보고 있었다.

하준은 손을 내렸다.

“그냥 봤어.”

“야구부는 돈 많이 든대. 글러브도 사야 하고.”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리틀은 부모님도 많이 와야 한대.”

“너희 엄마 바쁘잖아.”

하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 하나가 전단 아래쪽의 이름 적는 칸을 보더니 말했다.

“근데 너 이름 뭐로 써?”

“뭐?”

“미즈하라? 아니면 강?”

다른 아이가 웃었다.

“둘 다 쓰면 안 돼?”

“두 명인 척해서 자리 두 개 받으려고?”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웃었다.

큰 웃음은 아니었다.
선생님이 보면 장난이라고 할 만한 웃음이었다.

그래서 더 애매했다.

화를 내면, 하준만 이상한 애가 될 것 같았다.

하준은 전단에서 눈을 뗐다.

“안 해.”

“뭐?”

“야구 안 한다고.”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하지만 그날 방과 후, 하준은 집으로 곧장 가지 않았다.

하천 쪽으로 걸었다.

집 근처 골목에서는 공을 던질 수 없었다.
벽에 맞으면 소리가 울렸다.
어른들이 나와서 화를 냈다.

학교 운동장은 야구부 아이들이 썼다.
공원은 유치원 아이들과 엄마들이 있었다.

하준이 던질 수 있는 곳은 사람이 없는 곳뿐이었다.

하천 둔치 아래에는 오래된 콘크리트 벽이 있었다.
철교 그림자가 오후마다 길게 드리우는 곳이었다.

벽에는 낙서가 조금 있었고, 비가 오면 물때가 검게 남았다.

아무도 오지 않는 곳.

하준은 그곳에 섰다.

손에는 문방구에서 산 싸구려 고무공이 있었다.
야구공은 아니었다.
하얀색도 아니었다.
노란색에 가까운 공이었다.

하지만 둥글었다.

하준은 그것을 오래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벽을 향해 던졌다.

탁.

공은 벽에 맞고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

하준은 놀라 달려갔다.
공은 풀숲에 들어가 있었다.

두 번째도 그랬다.

탁.

이번에는 낮게 튀더니 하천 쪽으로 굴러갔다.
하준은 허겁지겁 달려가 물에 빠지기 직전에 잡았다.

심장이 뛰었다.

공 하나뿐이었다.

잃어버리면 끝이었다.

하준은 다시 벽 앞에 섰다.

이번에는 조금 천천히 던졌다.

통.

공은 벽에 닿았다가 발치 근처로 돌아왔다.

하준은 눈을 크게 떴다.

다시 던졌다.

통.

조금 옆으로 갔다.

다시.

통.

이번에는 더 가까웠다.

다시.

퉁.

공이 손 앞까지 돌아왔다.

하준은 숨을 멈췄다.

되는구나.

던지면 돌아오는구나.

누가 받아주지 않아도.
누가 같이 하자고 말하지 않아도.
공은 돌아올 수 있었다.

하준은 벽을 보았다.

회색 콘크리트 벽.

말이 없는 벽.
웃지도 않는 벽.
이름을 묻지 않는 벽.
어디 사람이냐고 묻지 않는 벽.

하준은 주머니에서 작은 돌멩이를 꺼냈다.
벽에 선을 그었다.

처음에는 삐뚤었다.
다시 그었다.
이번에도 삐뚤었다.

몇 번을 긁어 만든 네모는 형편없었다.

하지만 하준에게는 그것이 스트라이크존이었다.

그는 한 걸음 물러섰다.

노란 고무공을 쥐었다.

텔레비전 속 투수처럼 다리를 들어 올려보았다.
몸이 흔들렸다.
우스꽝스러웠다.

아무도 보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했다.

공이 손끝에서 떠났다.

탁.

네모 안쪽이었다.

하준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 소리가 귓속에 남았다.

탁.

아무도 박수치지 않았다.
아무도 달려오지 않았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래도 하준은 조금 웃었다.

그날부터였다.

강하준이 벽에 공을 던지기 시작한 것은.

처음 목표는 한가운데였다.

네모의 가운데.
돌로 가장 깊게 긁어놓은 점.

그 점을 맞히면 공이 적당히 돌아왔다.
조금 높으면 공이 튀어 올랐다.
조금 낮으면 땅에 처박혔다.
조금 옆이면 풀숲으로 달아났다.

공은 정직했다.

사람보다 정직했다.

하준이 잘못 던지면, 공은 멀어졌다.
하준이 똑바로 던지면, 공은 돌아왔다.

그래서 하준은 점점 더 똑바로 던졌다.

학교가 끝나면 둔치로 갔다.
비가 오지 않으면 던졌다.
손이 아프면 쉬었다가 다시 던졌다.
공이 더러워지면 강물에 씻었다.
물에 젖은 공은 무거웠지만, 그래도 던졌다.

며칠 뒤, 네모 안에는 선이 하나 더 생겼다.

위와 아래.

그다음에는 세로선이 생겼다.

왼쪽과 오른쪽.

한가운데였던 목표는 둘이 되고, 넷이 되었다.

하준은 그 네 칸을 하나씩 맞혔다.

처음에는 운이었다.
그다음에는 감각이었다.
나중에는 습관이 되었다.

어깨가 아픈 날에는 낮게 던졌다.
손끝이 미끄러운 날에는 공을 더 오래 쥐었다.
바람이 강한 날에는 조금 안쪽을 노렸다.

누가 가르쳐준 건 아니었다.

하준은 그저 공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공 하나를 잃으면, 다시 사야 했다.
다시 사려면 엄마에게 말해야 했다.

엄마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하준은 공이 돌아오게 던지는 법을 배웠다.

어느 날, 외할머니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아이고, 이 손 봐라.”

손가락 끝이 까지고, 엄지 옆에는 굳은살이 올라와 있었다.

“어디서 이래 만들고 왔노?”

하준은 손을 빼려 했다.

“그냥 넘어졌어.”

“넘어졌는데 손가락 끝만 이래 까지나?”

외할머니는 눈을 가늘게 떴다.

“요 며칠 학교 마치고 바로 안 오더만.”

하준은 입을 다물었다.

“가방 밑에 흙도 묻어 있고, 양말에는 풀씨가 붙어 있고.”

외할머니는 혀를 차며 약통을 뒤졌다.

“어디 강가라도 갔다 왔나?”

“……그냥.”

“그냥은 무슨 그냥이고.”

하준은 손가락에 묻은 먼지를 내려다보았다.

외할머니가 반창고를 뜯으며 물었다.

“공 갖고 놀았나?”

하준의 어깨가 살짝 굳었다.

그걸 본 외할머니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맞네.”

“……야구 아니야.”

“누가 야구라 캤나. 공 갖고 놀았냐 물었지.”

하준은 더 작게 말했다.

“그냥 던진 거야.”

“혼자?”

하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그의 손가락에 반창고를 감아주었다.

“던질 거면 손부터 챙기라. 손 다 까지면 밥숟가락도 못 든다.”

“괜찮아.”

“괜찮기는. 니는 맨날 괜찮다 카지.”

외할머니는 반창고 끝을 꼭 눌렀다.

“공 잃어버리면 또 사달라 소리도 못 할 거 아이가.”

하준은 고개를 숙였다.

“……응.”

“그라믄 조심해서 던져라. 사람 없는 데서. 물가에는 너무 가까이 가지 말고.”

하준은 고개를 들었다.

“하지 말라고 안 해?”

외할머니는 잠깐 하준을 보았다.

“하지 말라 카면 안 할 기가?”

하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외할머니가 피식 웃었다.

“그럼 다치지나 말고 해라.”

그날도 하준은 둔치로 갔다.

해가 질 무렵이었다.
강물은 붉게 물들었고, 철교 위로 전철이 지나갔다.
전철 소리가 벽에 부딪혀 둔하게 울렸다.

하준은 네모의 오른쪽 위를 노렸다.

공이 손끝에서 빠져나갔다.

통.

정확히 맞았다.

공은 벽에서 튀어 나와 하준의 가슴께로 돌아왔다.
하준은 두 손으로 받았다.

다시 던졌다.

통.

이번에도 돌아왔다.

다시.

탁.

다시.

통.

그때였다.

“야.”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하준은 공을 떨어뜨릴 뻔했다.

고개를 돌렸다.

둔치 위 계단에 누군가 서 있었다.

키가 큰 형이었다.

교복 바지는 흙이 묻어 있었고, 어깨에는 야구 가방이 걸려 있었다.
모자는 손에 들고 있었다.
햇빛이 등 뒤에 있어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준은 본능적으로 공을 등 뒤로 숨겼다.

형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너, 그거 누가 가르쳐줬냐?”

하준은 한 걸음 물러났다.

“아무도요.”

“아무도?”

형은 벽을 보았다.

삐뚤게 그어진 네모.
그 안을 나누는 선들.
그리고 벽 곳곳에 남은 공 자국.

형의 눈이 조금 달라졌다.

“몇 학년이냐?”

“……초등학교 4학년.”

“야구부야?”

하준은 고개를 저었다.

“리틀?”

또 저었다.

“그럼 왜 던져?”

하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왜 던지냐고?

고시엔에 가고 싶어서.
헹가래를 받고 싶어서.
팀에 들어가고 싶어서.
누가 내 공을 받아줬으면 해서.

그런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대신 하준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이…….”

“공이?”

“똑바로 던지면, 안 없어져요.”

형은 잠시 말이 없었다.

강바람이 불었다.
철교 아래에서 물새가 날아올랐다.

형은 하준을 보다가, 갑자기 웃었다.

비웃는 웃음은 아니었다.

어쩐지 조금 아픈 웃음이었다.

“이름이 뭐냐?”

하준은 망설였다.

학교 이름을 말해야 할지, 집 이름을 말해야 할지 몰랐다.

“미즈하라…… 하루토.”

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타치바나 렌.”

그 이름은 하준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세이료 고등학교의 에이스.
동네 상점가 사람들이 가끔 이야기하던 이름.
올해는 진짜 고시엔에 갈지도 모른다는, 그 사람.

렌은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글러브를 꺼냈다.

하준은 숨을 멈췄다.

진짜 글러브였다.

낡았지만 잘 길든 갈색 글러브.
가죽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렌은 글러브를 손에 끼고, 하준에게 턱짓했다.

“던져봐.”

하준은 벽을 보았다.

그리고 렌을 보았다.

벽은 늘 거기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움직였다.
사람은 말했고, 보고 있었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준은 공을 쥐었다.

손이 조금 떨렸다.

“어디로요?”

렌이 글러브를 가슴 앞에 들었다.

“여기.”

하준은 처음으로 벽이 아닌 곳을 보았다.

돌로 긁은 네모가 아니라,
회색 콘크리트가 아니라,
사람의 손에 끼워진 글러브.

그곳에 공을 던져야 했다.

하준은 다리를 들었다.

몸이 굳었다.

공이 손끝에서 떠났다.

팍.

글러브가 작게 접혔다.

벽과는 전혀 다른 소리였다.

튀어나가는 소리가 아니었다.

받아주는 소리였다.

팍.

공이 살아서 어딘가에 들어간 소리였다.

렌은 글러브 안의 공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하준을 보았다.

“야.”

하준은 숨도 못 쉬고 있었다.

렌이 말했다.

“너, 벽한테 던지기엔 좀 아깝다.”

그 말이 하준의 여름을 바꿨다.

그때 하준은 아직 몰랐다.

그 형이 자신에게 처음으로 야구를 알려줄 사람이라는 걸.
그리고 언젠가 자신이 그 형을 오해하게 될 거라는 걸.

또, 몇 년 뒤.

다시 이 동네로 돌아와,
망가진 야구부의 마운드에서,
벽이 아닌 사람에게 공을 던지게 될 거라는 것도.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다만 하준은 렌이 다시 던져준 공을 받았다.

처음으로 누군가가 돌려준 공이었다.

하준은 그것을 두 손으로 꼭 쥐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공이 돌아왔다.

벽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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